유치원에 잘 적응하기.

다섯 살이 되고 유치원에 다니면서 마음속에 고이 품은 바람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잘 적응하는 것. 친구와 사이좋게, 즐겁고 건강하게, 유치원 생활을 누리는 것. 그 이상 바라는 건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비슷한 시기에 업데이트되는 또래 엄마들의 프로필 사진들이 영 심상치 않았다.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흘려 보는 편인데 사진들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이름’ 이었다.

이름하여 이름 쓰기.

너 나 할 것 없이 다섯 살이 되면 자신의 이름을 삐뚤빼뚤하게나마 써내는 모양이었다. 다섯 살 인생 과업의 성패가 이름을 쓰느냐 못 쓰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도 아니고, 이 나이에 반드시 그러란 법도 없었지만 또래 아이들이 이맘때 즈음 자신의 이름을 곧잘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정작 내 아이는 이름은커녕 연필 한 번 쥐고 글자 비슷한 것을 단 한 번이라도 끼적여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낯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럽게 느껴졌다. 결국 이름 쓰기란, 내 아이가 여섯 살이 되기 전에 반드시 해내어야 할 필수 과제가 됐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한글은 진즉에 떼고 책을 줄줄 읽는 아이가 있더란다, 읽다 못해 쓰는 아이, 1에서 100까지 세고 연산을 하는 아이, 영어까지 술술 읽고 쓰며 말하는 아이가 부지기수란다… 이제껏 카더라 소식은 한 귀로 듣고 나머지 귀로 흘리는 편에 속했는데 웬일인지 아이와 관련한 일에서만큼은 귀가 사정없이 팔랑거리고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고 괜스레 주눅이 들거나 한참은 게으르고 무지한 엄마가 되는 것 같은 이상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름 쓰기가 그랬다. 그래서 프로필 사진에서 시작된 다른 아이들의 이름이 내 아이를 책상 앞에 앉혔고 생전 처음으로 연필을 쥐게 만들었다.

"너의 이름은…"

아이는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쓸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인데 아이는 연필을 쥐는 방법도 몰랐고 쥘 힘도 없었다. 문득 서너 살 시절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머니, 소근육의 발달이 아직 미흡해 보여요. 손에 힘을 기를 수 있는 연습 좀 많이 시켜주세요.'

알고는 있었지만 외면했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따끔따끔했었지만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어 내버려두었는데 그게 화근이었을까. 이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에라도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연필을 쥐는 방법, 책상에 앉을 때의 바른 자세, 글자는 자고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써야 한다는 사실. 그러나 아이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한계에 도달했는지 몸을 배배 꼬아대기 시작했다. 이름 쓰기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는데 아이와 나는 이름 한 자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동시에 드러눕고야 말았다. 이래서 학습지 선생님을 모셔야 하는 거구나 절실히 깨달았다.

한 획 쓰고 드러눕고, 한 획 쓰고 드러눕고… 이후에도 여러 번 이름 쓰기 연습을 했지만, 때마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이상한 그림 같은 글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도저히 일이 진척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획만 쓰면 되는데 거기까지 다다르기엔 너무나 멀고 먼 여정이었다. 이름 석 자에 도달하기가 이리 힘든 일이었다니. 아이도 나도 점점 지렁이가 되어 가고 이대로 가다가는 서로 마음만 상하겠다 싶어 포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름 쓰기 과제는 보류 상태로 남았다. 아이는 이름에서 해방된 게 기쁜 나머지 훨훨 날아다니며 춤까지 추었고 난 한 마리 나비가 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언젠가는 다 하겠지. 설마 커서도 자기 이름 하나 못 쓸까.”

아이가 말이 느렸을 때, 가위질이 힘들어 낑낑댔을 때, 대변을 가리지 못해 다 크도록 기저귀에 볼일을 보던 때에도 남편이 해주던 답변은 늘 한결같았다. 하소연은 천차만별이었지만 희한하리만큼 무신경한 대답은 하나같이 '언젠간 다 한다'로 끝이 났다. 이 사람은 이리도 답변에 성의가 없을까 싶었는데 정말 신통방통하게도 이제껏 모든 일은 남편의 말대로 흘러갔다. 때는 조금씩 달랐지만 어쨌든 아이는 다 해내었다. 늦었지만 말도 트였고, 가위로 종이는 물론 나의 머리카락까지 자르려 했으며, 대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한글을 읽고 쓰는 데는 도통 관심 밖이었지만 신발을 자신의 이름이 적힌 신발장 자리에 정확히 넣을 줄 알았으며 공룡 이름만큼은 기가 막히게 알아맞혔다. 영어는 읽고 쓸 줄 몰라도 어설픈 발음으로나마 알파벳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신나게 부를 줄은 알았다.

아들아, 그거라도 어디냐. 헛웃음이 나왔다.

이름 쓰기는 언젠가는 다 하게 되리라는 미완결의 숙제인 채로 남겨두었지만,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과제들이 닥쳐올 때마다 어느 것을 남겨두고 어느 것을 질기게 붙들지를 적절히 가려낼 재간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다 하겠지’가 통하지 않을 순간도 분명히 찾아올 텐데, 아이는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태연히 웃으며 일어설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아이를 온전히 바라보고 지지할 수 있을까. 다른 아이들은 다 해내는데 너는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하냐며 한소리 않을 자신이 있을까.

마음속에 고이 품은 바람이 오직 하나뿐이었다가 어느덧 둘에서 셋으로 자꾸자꾸 늘어만 간다.

💬 연필만 쥐면 드러눕던 아이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다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름 쓰기 연습을 하면서 제가 욕심이 참 많은 엄마였다는 걸, 아이 공부 지도는 웬만한 내공 없이는 집에서 쉬이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됐습니다. 전 진즉에 아이 공부에 손을 놓아야겠더라고요. 답답함에 제 가슴을 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보다 제가 깨우친 게 더 많았던, 아주 뜻깊은 이름 쓰기 시간을 보냈습니다.

객원 에디터  |  오은미

공룡을 사랑하는 5살 남자와 탱크를 사랑하는 37살 남자 사이에서 늘 고군분투하는 35살 여자이자 엄마예요. 육아를 시작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하고 있어요. 참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많지만 그 속에서 감사와 행복을 찾으려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