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자마자 엄마 오리만 졸졸졸 쫓아다니며 삐악거리던 아기 오리가 어느새 조금씩 날개를 퍼드덕 거리는 연습을 시작했다. 노란 민들레 꽃잎 같던 털에도 조금씩 하얀 솜털이 피어난다.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작고 작았던 2.9kg의 아이도 어느새 기고 걷고 뛰고를 반복하더니 제 몸집만한 가방 하나를 메고 형님 행세를 한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아침마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며불며 매달리던 아이였는데 어느덧 잠깐의 헤어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줄 알게 됐다. 다 키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다녀오겠습니다.”

공손하게 인사하며 뒤돌아서는 아이의 씩씩한 뒷모습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젠 안 간다고 울거나 떼쓰지 않아서, 힘겨루기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참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덤덤하게 떠나겠다는 아이가 참 낯설다. 하지만 다녀오겠다는 그 당찬 선언이 잠깐의 헤어짐 끝에 곧 만날 거란 굳은 다짐이 서려있기에 대견하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헤어지며 몸은 점점 멀어져도 눈은 아이의 발뒤꿈치를 따라 들어가며 영영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또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낯선 대견함 속에 배웅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문득 얼마 전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던 엄마가 생각났다.

동생네 부부가 결혼하고서 처음으로 친정에서 함께 모인 자리였다. 부모님은 예나 지금이나 가게 일로 바쁘셔서 저녁식사는 우리 자식들끼리만 먼저 먹게 됐는데 일요일 저녁시간이라 집까지 가는 데 차가 한참은 밀릴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맘이 급해졌다. 그래서 서로 다정한 이야기 몇 마디 나눌 새 없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게 됐다. 엉덩이도 한 번 못 붙이고 부산스레 움직이는 엄마를 보며 예전 같으면 가게 일이 바쁠 땐 너나 할 것 없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지 않으면 서릿발 같은 호통이 나곤 했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선 희한하게도 설거지 한 번을 안 시키는 게 괜히 더 미안한 맘이 들어 팔을 걷어붙이자 엄마가 한사코 말린다.

“너도 애 보느라 힘든데 친정에 까지 와서 무슨 설거지냐.”

그렇게 먹은 그릇들만을 치우고 있는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엄마는 무언가를 바리바리 챙기기 시작했다. 동생네 것과 내 것의 몫을 나눈 반찬 몇 가지와 식재료들이었다. 그러면서 배달 가신 아빠 얼굴만 마저 보고 가라는 말도 덧붙이는 것이다. 아직 간다고도 안했는데 눈은 어두워도 눈치는 백단이다. 그렇게 배달을 나갔다 돌아오신 아빠 얼굴을 보자마자 무심히 “또 올게요.” 툭 인사 한 마디만을 내뱉고 휑하니 돌아서 나왔다. 그렇게 집에 돌아가서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하필 지금 엄마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엄마도 그날 동생과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었다. 그렇게 한결같은 등대처럼 서서 날 지켜봐 주던 엄마. 무려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행여나 길을 잃고 헤매진 않을까 희미하게라도 나의 발걸음 언저리를 무던히도 비춰주려 애쓰던 엄마. 그런 엄마가 한때는 몹시도 지겹고 질려서 악착같이 벗어나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이 있었다. 엄마 냄새가 베인 집에 붙박이장이 될까 싶어 그랬던지, 아님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오리 마냥 하늘 높이 날아가고 싶어 그랬던지 그 땐 등대가 비춰주는 온전한 길을 한사코 거부하고 내 맘이 이끄는 대로 떠나고만 싶었다. 그러다 바라고 바라던 독립을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젠 엄마냄새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금은 지겹고도 질리도록 엄마 냄새가 맡고 싶은데 아이 때문에 정신없고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엄마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도, 얼굴 한 번을 보는 것도 큰맘을 먹어야지만 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진심은 그렇지 않은데 아직까지도 엄마 앞에서는 반대로만 하고 싶은 퉁명스런 청개구리가 되는 걸 보면 아직 영락없는 애인 것만 같다. 생각난 김에 엄마에게 전화를 드렸다.

“엄마.”

“왜? 무슨 일 있어?”

“그냥요. 엄마, 다음 돌아오는 휴일에 또 갈게요. 밥 먹으러.”

“그래. 언제든지 와. 시간 나면 하루 자고 가렴.”

“응. 그럴게요. 빨리 갈게.”

유치원에 갔던 아이는 오후 네 시쯤이면 돌아오겠지만 시집을 가 버린 딸은 돌아오는데 한참은 걸린다. 그래서 더욱 힘주어 말했다. 빨리 가겠다고.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 엄마에게 돌아선 뒷모습이 아닌 웃으며 돌아오는 딸의 환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서.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들도록 활짝 웃는 얼굴로 엄마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수십 년을 어린 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을 나의 엄마를 위해 아이였던 내가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줄 차례가 왔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수많은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문득 떠오른 그 때 그 시절 엄마의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엄마, 저 왔어요.”

“그래, 어서 와라.”

오랜만에 엄마 냄새가 가득히 베인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지겹고도 질리도록 엄마 옆에 딱 붙어있을 요량이다. 그리고 떠날 땐 엄마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느 새 할머니가 돼버린 엄마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어야겠다. 나의 엄마가, 우리 엄마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나에게 해주었듯, 또 올게 엄마 하고 굳은 다짐이 서린 인사와 함께,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