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첫 옹알이가 선명하다.

부모라면 모름지기 아이의 입에서 피어난 엄마, 아빠 소리는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잔뜩 기대했고, 바랐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그 때 처음 알았다. 아이의 입에서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가슴절절한 일인지, 조금 다르고 늦다는 게 얼마나 가슴 졸이는 일인지, 한 떨기 꽃을 피워내는 일이 얼마나 고된 과정인지를 말이다.

아이가 처음으로 피운 꽃은 ‘아빠’였다. 내심 엄마란 말을 먼저 하지 않을까 했었는데. 아빠의 어깨가 히말라야 산봉우리만치 높게 솟아올랐다. 머쓱했지만 아빠란 말을 했으니 뒤이어 엄마도 금방 해주겠지 잔뜩 기대한 채 첫 돌을 보내고 두 돌을 기다렸다. 그러나 두 돌이 한참이 지나도록 ‘엄마’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백일이 되기도 전에 뒤집기를 하고 이어서 배밀이도 건너뛴 채 기고 앉고 하더니 짚고 일어서는 연습을 무던히도 하다 정확히 생후 10개월에 들어서 걸음마를 떼었다. 덕분에 일찍부터 온 데를 돌아다니는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진땀을 뺐다. 그래서였을까. 더더욱 내 아이가 말이 느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걸음도 빨리 떼었으니 말도 금방 하겠거니 오히려 그런 터무니없는 기대감까지 가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리원 동기모임 채팅방에서 아이들이 이제 조금씩 말이 트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20개월 즈음이었는데 그때까지도 아이는 아빠 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엄마란 말도 거의 하지 않아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아이의 입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입에는 일명 ‘쪽쪽이’ 라 불리는 공갈젖꼭지가 불안에 떠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대롱대롱 매달린 채 종일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날, 공갈젖꼭지와 과감히 헤어졌다. 대신 눈물로 지새는 쓰라린 밤들을 겪어내야 했지만 말을 안 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그 작디작은 입에서 ‘엄마’ 꽃이 피어나는 걸 봐야만 했다.

그러나 불안에 잠식당하던 엄마 마음도 모른 채 아이는 손가락을 냉장고 틈 사이에 끼워 넣으며 먹을 걸 요구하거나 내 손을 질질 끌고 다니며 말 보다는 행동으로 욕구를 표현하는 일이 허다했다. 결국 검사를 받고 12개월 수준에 멈춰진 언어시계를 돌려보고자 부리나케 언어치료센터를 방문했다. 치료사 선생님의 눈빛이 제법 날카로워 보였다. 어떻게 내 아이를 보실까, 또래들과 많은 차이가 날까 온갖 생각이 스치는데 평소에도 예민하고 경계심이 많던 아이는 그날따라 유독 내 무릎에서 내려오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고 당시 할 수 있던 말이라고는 ‘엄마’, ‘아빠’, ‘응’ 밖에 없던 아이에게 ‘주세요’ 한마디를 시키려 아이를 눈물짓게 만드는 상황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끝끝내 입도 뻥긋 못한 건 아이 뿐만 아니라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참혹한 침묵의 시간은 그동안 아이를 방치한 것만 같은 고통스런 죄책감으로 변해갔다.

“우리 아이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센터에서 겪은 이야길 듣고 난 후에 이어진 남편의 작심발언. 딴에는 여유를 좀 가져보자는 뜻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타들어가는 내 속은 알아주지도 않고 저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걸까 싶어 남편에게 그동안 참아왔던 속앓이들을 억수같이 쏟아 붓고 눈물인지, 불안인지 모를 속의 것들을 한동안 잔뜩 토해내었다. 그러자 말을 억지로라도 해야만 했던 상황 속에 내던져진 아이가 선연히 떠올랐다. 그래, 딱 36개월까지만 기다려보자. 대신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해보자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우선,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작은 방으로 옮기고 플러그를 뽑았다. 오직 놀잇감과 책으로만 거실을 가득 채우고 절간처럼 조용하기만 하던 집에서 하루 종일 동요가 울려 퍼지도록 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어주고 집안일도 제쳐놓고 아이와 눈을 맞추며 일방적이지만 끊임없는 대화를 거는 일을 숙명처럼 여긴 채 36개월에 접어들었다. 

그즈음 희한하게도 알 수 없는 옹알이 같은 말들을 폭풍처럼 내뱉는 일이 잦아지고 부정확한 발음이지만 조금씩 말도 따라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까진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극적인 변화였다. 그렇게 희망이 보인 순간부터 오로지 아이의 입술 끝에 피어난 한 마디 한 마디를 소중히 여기며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에 집중했다. 간절한 노력의 결실이었을까.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이는 거짓말처럼 청산유수 같은 꽃 한 떨기를 피워내며 지금은 조잘조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쉼 없이 이야기하는 수다쟁이가 되었다.

말 한마디를 내뱉기까지는, 한 떨기 꽃을 피우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지 그전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아무 노력 없이 한순간에 짠하고 피는 꽃인 줄로만 알았다. 돌이켜보니 아이의 정원에 당연하게 피는 꽃이란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고 많은 꽃들을 피워낼 진 알 수 없지만 아무런 노력의 시간 없이 피어나는 꽃들은 없으리란 걸 알기에 그저 단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부디 그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기를, 모두에게 가혹한 시간으로 남지는 않기를, 그땐 그랬지 웃으며 떠올릴 꽃 같은 추억이기를 바라고 바라본다. 피어야만 하는 꽃은 언젠가는 반드시 향기롭게 피어나고야 말테니.

💬 우리 아이가 피워낸 꽃을 보는 일은 참 아름답고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을 보는 게 참 힘들 게 느껴지는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힘들게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는 우리 올맘님들과 아이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바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예쁜 꽃이 피어날 거예요.

객원 에디터  I  오은미

공룡을 사랑하는 5살 남자와 탱크를 사랑하는 37살 남자 사이에서 늘 고군분투하는 35살 여자이자 엄마예요. 육아를 시작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하고 있어요. 참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많지만 그 속에서 감사와 행복을 찾으려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