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동시에 허니문 베이비로 아기가 생겼다. 그 해는 내가 ‘주산’ 방과 후 교사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해였다. 취업에 실패하고 고시에도 실패 하고 벼랑 끝에 서있을 때, 한 줄기 빛처럼 접하게 된 게 ‘주산’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늦게 가져 더 소중했던 나의 일. 그래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바로 감사하지 못했다. 이제 막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일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으니까. 신혼도 즐기고 싶었고 돈도 모으고 싶었고, 무엇보다 이제 막 시작한 내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당시 나에게 임신이란 이런 바램들의 정 반대편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임신은 위대한 것이었고 남편과 나를 닮은 우리의 아기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주변을 돌아보니 이렇게 생명이 찾아와 주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잠시나마 이런 마음을 가졌던 게 미안해 아직 쌀알 만한 배 속의 아이에게 엄마가 너무 미안하다며 엉엉 울었더랬다.

신혼집은 TV가 없었다. 1호가 태어난 후 적막한 집에서 아기와 나, 강아지 호두 셋이서 함께 낮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아기가 잠들고 나면 육퇴라는데… 그 시절 나에게는 육퇴가 없었다. 아기는 200일이 넘어서야 겨우 5시간 통잠을 잤고 오랫동안 새벽수유를 했다. 아기가 잠깐 잠든 시간에 찾아오는 여유가 어찌나 반갑던지. 밀린 집안일도 하고, 핸드폰으로 삼시세끼 재방송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때. 그것도 아니면 아기와 함께 자야만 했다. 그렇게 지친 몸과 마음에 여유를 만들어 내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기를 돌봐야만 했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문득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내 주변 사람들의 시간은 모두 다 흐르고 있는데, 내 시간만 멈춰 있는 느낌이랄까. 모두가 앞을 향해 나아갈 때 나만 홀로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물론 한 생명을 키워낸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 인지 경험한 바 있기에 잘 알고 있다. 엄마의 피와 살을 깎아 아이가 건강히 자라주었지만, 24시간 중 엄마나 아내가 아닌 나 자신으로써의 오롯한 시간이 없었기에 적막과 함께 때로는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 때 나를 붙들어주었던 것이 바로 책이다. 다양한 책을 읽고 나면 파도 치던 마음이 잠시나마 고요해졌다. 친한 친구가 그 시절에도 지금도 좋은 책들을 많이 보내주곤 했는데 덕분에 책을 읽고 마음을 다스리다 이제는 글까지 쓰게 되었다. 어떤 책은 지난한 육아와 살림이 없는 또 다른 세상으로 나를 보내주었고, 어떤 책은 따뜻한 문장으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또 어떤 책은 내가 아닌 다른 길을 살아가는 이의 삶을 간접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 자리에 나를 대입해보며 나도 깨닫지 못했던 무의식 속 내 마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읽고 쓰는 동안 엄마도 아내도 아닌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요즘은 1호와 2호를 함께 재우고 나면 바로 육퇴다. 두 형제가 저녁 8~10시 사이 밤잠에 들어가면 나에게 자유 시간이 생긴다. 나의 수면 시간이 줄어들지라도 자유 시간을 즐기는 기쁨이 더 크므로 육퇴 후 자유 시간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 남편과 속 깊은 이야기를 하거나, 야식을 먹기도 하고, 각자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기도 한다. 시시콜콜한 예능을 보기도 하고 캠핑 유튜브를 찾아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낀다. 그래도 가장 기분 좋은 육퇴는 안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재 방에 들어가 좋아하는 책을 볼 때이다. 요즘은 에너지가 넘쳐 나는 아이들을 재우는 데 시간이 점점 오래 걸리고 있다. 아이들을 재우다 나도 곯아떨어지는 경우도 잦아진다. 그럴 때는 새벽에 혼자 일어나서 잠깐이라도 책을 읽는다. 잠깐이라 더 소중한 시간임을 알면서도 책 대신 핸드폰을 보기 시작하면 시간이 훌쩍 지나 가버린다. 바로 책을 펼쳐야 된다는 걸 알면서 미룰 때가 많지만 그래도 결국 책을 읽고 나면 좋다. 마치 운동하러 가기는 힘들지만, 막상 운동을 하고 나면 개운한 것과 같달까.

내년 3월이 되면 이제 2호도 어린이집에 간다. 그러면 나에게는 월요일부터 금요일,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7시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지는 셈. 가사 시간을 빼면 더 줄어들겠지만, 출산 후 처음으로 가지게 되는 가장 긴 자유 시간이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보다 두려운 마음이 더 크다. 근 3년 간 20개월 터울의 두 아이를 케어 하는 게 나의 주된 일이었는데, 할 일이 없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사회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기도 하고, 돌아갈 직장이 없어 불안하기도 하다. 앞으로 엄마와 아내가 아닌 나 자신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 지 한치 앞도 모르겠다. 우선 육아에 밀려 보듬어 주지 못하고 뒷전이 된 심신을 돌아보고 나 자신을 더 잘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겠지.

육아를 하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정들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정말 너무 힘든데, 정말 너무 행복한 그런 경험들. 다시 생각해보면 나 혼자 제자리에 붙박힌 것 같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은 사실은 나를 깊어지게 한 시간들이었다. 비록 사회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앞으로는 나아가지 못 했을진 모르나 분명 나는 더 사랑이 많아졌고, 누군가를 헤아리는 마음이 넓어졌으며, 사소함 속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모두 육아를 하며 우리 아이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내가 낳았지만 나의 소유는 아니기에 이 기간 동안 아이들의 ‘엄마’ 만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 바로 서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어떤 시간을 보내야 할 지 고민 중이다. 나 자신을 찾는 일은 곧 나만의 일이 아니라, 결국 아이들에게 더 자랑스럽고 멋진 엄마가 되어줄테니. 나처럼 불안함과 막막함을 가진 육아 동지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도 괜찮다고. 깊어지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나아가는 것도, 깊어지는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 올맘님들은 육퇴 후 어떤 시간을 보내시나요? 피곤한 몸을 말끔하게 해 줄 숙면도, 아무 생각 없이 와하하-! 웃어버릴 수 있는 예능 한 편도,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며 잊고 있던 나를 떠올리는 시간도 모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간들이죠🙂 매일 찾아오는 육퇴의 시간을 오늘은 무엇으로 채울지, 내가 부족한 시간이 무엇인지 균형을 맞추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의 나는 어떤 마음인지 어떤 시간이 필요한 지,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요? 😊

객원 에디터  I  Yulia

꾸럭미 넘치는 24개월 1호와 5개월 차 ����이 2호, 10살 호두(개) 어르신을 돌보며 애개육아를 하고 있어요. 육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을 배워가는 중이에요. 엄마가 되기 전엔 아이들에게 주산을 가르쳤어요.